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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액스

last modified: 2014-10-26 13:36:31 Contributors

Contents

1. 전투용 도끼
1.1. 던전 앤 파이터도끼
1.2.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의 도끼
2. 제2차 세계대전영국군의 배틀액스 작전
2.1. 개요
2.2. 작전의 배경
2.2.1.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파견과 추축군의 반격
2.2.2. 1차 토브룩 전투
2.3. 영국군의 반격
2.4. 브레버티 작전
2.5. 배틀액스 작전
2.6. 작전 실패
2.7. 결과

1. 전투용 도끼


<1475년 무렵의 마상용 도끼>

요리할 때 쓰는 것
Battle Axe. 도끼라는 것이 원래 공구에서 출발한 것이다보니 전투용 도끼란 것을 딱 잘라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목재를 팬다든지 하는 일반적인 도끼와는 대체로 날의 형상을 통해 구분할 수 있다. 공구용 도끼도 날 형상을 보고 패는 도끼와 쪼개는 도끼를 따로 구분해두는데, 전투용 도끼는 인간의 살점을 치고 뼈를 끊는 용도로 만들어졌으니 구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전투용 도끼날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 날이 얇고 길다는 것. 소방도끼나 나무 패는 도끼는 굉장히 굵지만, 전투용 도끼는 일반 도검보다는 배 이상 두꺼울 수 있으나 공구 도끼에 비하자면 날의 두께가 매우 얇은 편이다. 사람의 살을 가르고 뼈를 끊는데는 이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또한 가만히 있는 나무를 쪼갠다면 몰라도, 움직이는 적을 타격하려면 날 길이가 긴 것이 약간 빗맞아도 타격을 입히기 좋기 때문에 날의 길이가 길 필요가 있었다. 또한 내리찍거나 옆으로 휘두르는 사용법이 고정된 도끼와는 달리, 전투용 도끼는 자유자재로 휘두를 수 있게 밸런스도 고려하는 것이 특징.

그래도 공구로써 제작된 도끼를 전장에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애초에 겸용으로 제작된 경우도 많아서 구분은 흐릿한 편.

항시 휴대할 수 있고 한 손으로 사용하며 생활 공구로의 기능을 겸하는 아담한 도끼도 있고, 한손반 사용이 가능한 것도 있고, 양손으로 잡고 휘둘러야 하는 거대한 도끼까지 있다. 이런 거대한 도끼의 경우 폴암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프란체스카(프랑시스카), 바이킹들이 사용하는 도끼로 알려진 데인 액스, 북미 원주민들의 토마호크, 동유럽의 바디쉬 등이 대표적이다. 데인 액스나 바디쉬는 보면 알겠지만 평범하게 폴암 취급 하는 일이 많다.

양판소에는 보통 생김새는 장작패는 도끼와 흡사하지만 날이 크고 손잡이가 조금 더 긴 정도로만 표현된다. 주로 '야만인=도끼'라는 고정관념 덕분에 힘이 무식하게 높은 캐릭터의 전유물이 되었다.

게임이나 판타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양쪽 날의 형상이 동일한 양날 도끼를 배틀액스라고 칭하는 일도 많은데, 전투용으로 양날 도끼가 사용된 역사적 근거는 없다. 실제로는 판타지의 산물, 혹은 의장용 도끼. 그도 그럴 것이 폴액스나 할버드처럼 뒷날에 스파이크를 다는 식이라면 모를까, 똑같은 크기의 양날을 세워봤자 딱히 의미없이 무게만 늘어나기 때문. 도끼의 용법과 특징상 머리 부분의 무게가 늘어난다고 좋을 점이 없다. 얇은 도끼로도 사람과 갑주 상대로 충분하기 때문.

일부 판타지 소설에서는 한쪽 날이 방패나 갑옷을 베어 무뎌지면 다른 쪽 날을 쓰기 위해 양날 도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같은 크기의 도끼날을 양쪽에 달면 무게가 늘어나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되면 무게 중심이 무너져 적을 가격할 때 오히려 위력이 크게 약화되고, 도끼날로 베는 게 아니라 철퇴처럼 도끼날 옆으로 때리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되려 공구용 도끼 중에 한쪽 날은 패고 한쪽 날은 쪼개는 용도로 양날 도끼를 만든 경우가 있다. 이쪽이야 실용적인 목적에서 양날로 만든 것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1.2. 던전 앤 드래곤 시리즈의 도끼

전통적으로 전사의 표준 무장 = 검이라는 공식을 만들어낸 게임이다보니, 도끼 계열 무기의 취급이 미묘하다. 동급 무기인 롱소드와 뭔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대등하지만 롱소드보다 왠지 딸리는 느낌이 들도록 게임 데이터를 설계해야 하는데, 규칙을 거기까지 까다롭게 하지 않는 게임이다보니(할 수는 있지만 쓸데없이 번거로워지고) 성능면에서 뭔가 애매하기 십상.

클래식에서는 양손무기인 주제에 노멀 소드와 같은 1d8 피해. 웨폰 마스터리가 들어가야 좀 차이가 두드러지며 특성이 강해진다. 가격이 조금 싼 것 외에 롱소드보다 딱히 우월한 점은 없다. 그래서 드워프 아니면 잘 쓰지 않는 무기.

AD&D 2nd에서는 5 gp 가격, 스몰-미디움 1d8 피해, 라지 1d8 피해. 스피드 팩터 7. AD&D 2nd때는 배틀액스가 미디움 크기라서 한손 무기로 취급했다.
그에 대항하는 롱소드는 15 gp 가격, 스몰-미디움 1d8 피해, 라지 1d12 피해. 스피드 팩터 5. 역시 가격 외에는 압도적으로 성능이 딸린다.

D&D 3.5에서는 배틀액스 10 gp 가격, 1d8(20/x3) 피해, 롱소드 15 gp 가격, 1d8(19-20/x2) 피해로 크리티컬 확률과 배율로 차이점을 다르게 잡았다. 둘 다 한손 무기.

D&D 4th에서는 배틀액스 10 gp 가격, 숙련 보너스 +2, 1d10 피해. 롱소드는 15 gp 가격, 숙련 보너스 +3, 1d8 피해를 주어 밸런스를 잡았다. 배틀액스는 명중률이 약간 딸리지만 피해가 높고, 롱소드는 명중률이 좀 더 높지만 평균 피해라는 세팅. 가장 무난하고 적절한 밸런싱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4판은 파워 시스템과 연동해야 제성능이 나오는 게임 시스템인지라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의 예시 몬스터가 쓰는 기본 무기이기도하다.

캡콤던전 앤 드래곤(게임)에서는 드워프파이터가 쓰는 양손 도끼로 나왔으며 놀에게서 소매치기로 훔칠 수도 있다. 그러나 파워는 강한데 공격 속도가 느려 천대받았다.

2. 제2차 세계대전영국군의 배틀액스 작전

2.1. 개요

Operation Battleaxe. 1941년 6월 15일 ~ 6월 17일 사이 토브룩의 포위상황을 타개하고 최종적으로는 키레나이카에 대한 영향력을 재확보하기 위해 영국군이 시도한 반격작전이다. 독일군의 지연전과 반격으로 인해 영국군의 보급추진이 한계가 도달하여 영국군이 작전을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영국군의 작전은 실패했고 독일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2.2. 작전의 배경

2.2.1.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파견과 추축군의 반격

이집트 영내까지 진출한 이탈리아군을 구축하기 위해 영국군은 1940년 12월 8일부터 1941년 2월 9일까지 반격작전의 일환인 컴파스 작전(Operation Compass)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리비아 북부 해안도로를 따라 자리한 해안도시 및 요충지에서 이탈리아군의 주력 상당수를 격파하고 키레나이카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지중해에서 영국군의 영향력이 증대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OKW는 리비아 서부로 퇴각한 이탈리아군을 독일군이 직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북아프리카 전선의 붕괴를 막고 전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해바라기 작전(Operation Sonnenblume)을 통해 5 경사단[1]과 15기갑사단을 주축으로 한 지상군과 항공세력을 순차적으로 리비아에 파견했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증강된 독일 아프리카 파견군의 최선임자로 부임한 에르빈 롬멜은 그리스 전선과 에티오피아 전선으로 인해 전력이 분산될대로 분산된 영국군의 취약함을 인지했고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영국군 키레나이카 사령부와 2기갑사단을 와해시키는데에 성공했다.[2] 그렇지만 전력의 부족으로 인해[3] 해안도로를 따라 토브룩으로 이동하던 호주군 9 보병사단에 대한 포위섬멸은 실패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자신들이 기획한 작전계획안의 일정보다 더 빨리 영국군을 토브룩으로 몰아넣고 포위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결론적으로 롬멜의 주도로 독일군이 사전에 감행한 기만작전과 과감한 기습공격은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독일군은 제한된 통신망, 그리고 수송 장비 및 항공전력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던 영국군을 혼란의 도가니로 밀어넣었고 영국군 키레나이카 사령부 수뇌부와 영국군의 주요 기동전력인 2기갑사단 사령부의 중요 요인 대부분이 추축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힘에 따라 사실상 키레나이카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조직력은 사실상 붕괴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였다...

2.2.2. 1차 토브룩 전투


영연방군과 영국군은 전투를 계속 치루어 나가면서도 이탈리아군이 축조한 콘크리트 방어물을 기반으로 지뢰지대의 구축과 야전축성을 착실하게 수행했다. 그들의 노력은 이러한 강력한 요새망을 구축하게 했고 이에 대한 독일군의 평가는 독일의 유명한 전시 선전뉴스 기능을 담당한 주간 뉴스인 Die Deutsche Wochenschau에서 볼 수 있다.[4]

키레나이카 현지의 상급 지휘관인 니임과 오코너가 4월 6일, 철수중 포로로 사로잡히고 2기갑사단장 감비어 패리 소장은 인도 제3 차량여단장 본 준장과 함께 메칠리에 대한 추축군의 포위공격을 2일씩이나 저지하며 분전했지만 감비어 패리 소장과 제2 기갑사단 본부는 4월 8일, 메칠리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토브룩으로 퇴각하던 3 차량여단의 지원부대 일부와 함께 퇴각 도중 포로가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웨이벨 장군은 4월 8일, 토브룩을 방문하여 호주군 제9보병사단장 모스헤드 소장[5]에게 토브룩으로 후퇴한 모든 부대의 지휘권을 쥐어주어 붕괴된 지휘체계를 단일화하고 토브룩에서 방어전을 감행할 것을 요구했다.[6]

한편 메칠리에서의 영국군의 저항을 분쇄한 추축군은 4월 9일과 10일 사이에 토브룩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했다. 롬멜은 덩케르크의 사례는 물론 지금까지의 전과를 과대평가했고 때문에 영연방군의 사기와 전투의지가 낮을것이라 평가했다. 때문에 롬멜은 신속한 포위공격을 통해 영연방군을 손쉽게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추축군은 포위가 끝난 4월 10일부터 동원할 수 있는 부대를 총동원하여 토브룩에 대한 1차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메칠리에서 2기갑사단 잔존부대와 인도 3차량여단이 4월 6일부터 8일까지 벌어준 2일이라는 귀중한 시간 동안 큰 피해 없이 토브룩으로 이동한 호주군 제9보병사단을 중심으로 영연방군은 토브룩의 방어선을 신속하게 정비할 수 있었고 이는 토브룩에 대한 추축군의 급편공격에 맞선 방어전을 전개하는데에 큰 이점을 주었다. 화력계획하나 제대로 수립하지 않은 추축군은 영연방군의 화력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고착된 보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14일에는 5경사단 예하 5전차연대가 호주군의 대전차포와 지뢰망에 저지당함에 따라 토브룩에 대한 롬멜의 1차 공세는 실패하고 말았다.[7]

큰 피해를 입은 추축군과 마찬가지로 영연방군 역시 2주일 동안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영연방군은 1차대전에서의 풍부한 경험을 통해 거점 방어전에 대한 상당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모스헤드 소장을 중심으로 한 지휘부의 강력한 결전의지를 바탕으로 뛰어난 예비대 운용과 컴퍼스 작전 기간중 노획한 이탈리아제 무기[8]와 포병전력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야간에 과감한 소부대전투를 감행하는 것으로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추축군의 포위공격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했다.

단 며칠전까지만 해도 승승장구하면서 자신감과 영국군에 대한 우월감을 품고 있었던 독일군은 상당한 쇼크를 받았고 추축군의 초기 공세를 저지한 영연방군의 사기는 점점 진작되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추축군의 항공폭격과 포격에도 불구하고 토브룩의 방어상태는 사실상 배수진을 강조하는 모스헤드 소장과 휘하 장교들의 노력으로 인해 보강되고 있었다. 보급상황 또한 보급물자의 비축량 상승과 보급품 집적소에 대한 철저한 위장으로 인해 점점 개선되고 있었다.

토브룩을 둘러싼 추축군과 영연방군의 전투는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그리스에서 연합군을 몰아내고 있을 4월말까지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계속되는 공격이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전투의 양상이 단 2주일만에 기동전에서 소모전으로 변모하자 이에 초조해진 롬멜은 베를린을 방문해 전력증강을 요구했으나 프린츠 할더 대장을 중심으로 한 본국의 상관들은 롬멜의 독단적인 행동과 무리한 요구를 문제시 삼아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고는[9] 전선의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OKH가 하달한 훈령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외교적인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을 롬멜의 독단적인 작전행위[10]를 저지하기 위해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중장[11]을 북아프리카에 파견했다. 그는 4월 27일에 현지에 도착하여 4월 30일에 시작된 롬멜의 2차 공세에 대한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고 공세를 참관했으나 독일군 5경사단과 이탈리아군의 합동공격은 초기에는 1차 방어선[12]을 돌파하는 성과를 이루어냈으나 연합군이 방어전 기간 동안 꾸준히 설치한 촘촘한 지뢰밭과 대전차포 진지에 저지당해 전과확대에 실패했고 돌파제대 또한 곧바로 투입된 예비대의 반격에 격퇴당했다.

2차 공세의 실패로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이에 파울루스는 본국에 이를 비교적 객관적으로 보고했다. 2차 공세의 실패에 다급해진 롬멜은 가용가능한 15기갑사단 예하 104, 115보병연대에서 가용가능한 병력을 차출하여 공격을 반복했으나 전차대의 계획적인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 공격은 독일군에게 큰 피해만 주었을뿐 실패하고 말았다.

롬멜은 공격을 중지하는 대신 돌파구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함으로써 전차와 포병을 동반한 호주군 18여단의 반격을 저지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영국군과 영연방군 포병대는 돌파구로 화력을 집중하여 돌파구로 이동하던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롬멜은 지상을 통한 돌파시도는 더 이상 무리라고 판단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주시하는 파울루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때문에 롬멜은 공격의 방식을 정공법에서 포위에 의존하여 적의 후방을 지속적으로 타격하는 것으로 바꿀수 밖에 없었다.

추축군은 프랑스군에게서 노획한 공성포를 포함해 상당수의 장사정포를 동원했지만 영연방군은 이에 소부대를 이용한 과감한 야간정찰을 연거푸 시도하여 포진지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대포병사격으로 응수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롬멜은 토브룩 포위전 기간 동안 시실리에 거점을 두고 있던 10항공군단과 아프리카 주둔 독일 공군에게 토브룩의 주요 방어거점과 정수시설, 시레인의 차단을 요구했고 이에 독일 공군은 토브룩 포위전 내내 지속적인 항공공격을 가했지만 영연방군의 철저한 대공화력 분산과 위장, 대공화망 조절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을 수 밖에 없었다.[13]

그렇지만 영국 해군은 제공권의 상실속에서도 자신들의 임무를 포기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마타판 해전으로 위축된 이탈리아 해군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통상파괴전을 꾸준하게 실시하여 이탈리아 해군 주력함대의 시선을 이탈리아 본토와 보급선에 묶었고 결국 토브룩을 향한 해상호송로를 보호해냈다.

제대로된 해군력의 지원을 받지 못한 독일군은 물자보급선과 식수공급망을 1941년 11월에 개시되는 크루세이더 작전시기까지 끝내 차단하지 못했고 항공전력의 분산운용으로 인한 손실은 1941년 여름 동안 추축공군의 몰타 봉쇄에 상당한 차질을 주었고 그 기간중 영국군 지중해 함대 예하 구축함 함대가 활발한 통상파괴작전을 벌이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추축군은 토브룩을 제외한 키레나이카 전역을 단 10일만에 수복했지만 토브룩 포위전 내내 보급 부족[14]에 시달렸고 전방부대들은 재편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체 4월 한달 동안 끊임 없는 전투를 수행할 수 밖에 없었다.[15]

여담으로 영연방군은 이 전투에서 멀쩡한 3, 4호 전차를 최초로 노획했다.

2.3. 영국군의 반격

당시 블레츨리 파크(Bletchely Park)의 주도로 실행되고 있던 체계적인 구조의 암호해독 작전인 암호명 울트라를 통해 영국군은 아프리카 파견 추축군의 상황을 본국으로 상세하게 보고하는 파울루스의 전문을 감청할 수 있었다. 상부로부터 받은 명령이 명령인 만큼 본국으로 타전된 파울루스의 전문은 영국군에게 아프리카 파견 추축군의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관한 정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파울루스는 전황과 현지 지휘부의 동향, 동맹군에 대한 관찰 및 상태 말고도 아프리카 파견 추축군의 군수상황(물자 추진능력의 부족)과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의 부족을 거론했고[16] 아프리카 파견 독일군의 역할이 이탈리아군을 보조함으로써 전선의 무게추를 맞추는데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능한 참모장교인 파울루스의 전문과 감청된 추축군의 무전 정보들은 그리스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와 동남아시아의 방위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높으신 분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토브룩에서 쌍방의 접전이 점점 가열되고 있는 4월 내내 토브룩의 용전분투로 시간을 번 웨이벨 장군은 고트 장군과 함께 역시 병력 및 장비의 부족으로 인해 생겨나는 열악함으로 인해 허우적거리는 영국군 기갑부대를 재정비하고 본국의 지원을 기다렸고 런던의 높으신 분들은 영국군이 그리스에서 많은 가용물자를 상실했다는 점을 주목하고 대규모 호송선단을 통해 대량의 물자 및 병력 증파를 계획함으로써 중동전선을 보다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런던의 높으신 분들이 물자 및 병력지원에 대한 확실한 보장을 하고 암호해독과 무전 감청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게된 웨이벨 장군은 할파야 고개를 경계로 한 전초전의 수위를 강화함으로써 보다 확실한 추축군의 전력 수치를 얻으려고 했다.

토브룩에 대한 포위공격에 치중하고 있던 롬멜 또한 4월 내내 부쩍 늘어난 이집트 주둔 영국군의 도발 및 위력정찰에 대응하기 위해 제5 경사단 예하 제3 정찰대대와 1호 대전차자주포를 편재한 제605 대전차대대, 이탈리아 포병대를 할파야 고개에 전초부대로 배치함으로써 그런 영국군의 행동에 대응했다.

영국군의 그런 행동이 곧 고강도의 공격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독일군은 일말의 의심도 품지 않았으며 독일군 또한 반격 준비를 서두르는 영국군에 대한 무전감청 수위를 높이기 시작했다.

2.4. 브레버티 작전

1941년 4월 중순, 웨이벨 장군은 반격작전인 배틀액스 작전에 대한 세부계획을 작성하면서 본국으로 부터 대규모 지원이 도달하기 이전에 본격적인 주공인 배틀액스 작전에 필요한 진격로와 보급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전초전을 시도함으로써 접경지대의 위치선점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리비아-이집트 접경지대에 자리한 추축군의 주요 거점인 할파야 고개와 솔룸을 타격하고 더 나아가선 카푸조 요새를 점령하고 거점을 강화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이집트의 정비창에서 정비를 끝맞추고 전선으로 복귀한 상당량의 기갑차량를 제7 기갑여단을 이끄는 고트 준장에게 위임했다.

고트 준장은 할파야 고지를 공격하는 지원부대를 중심으로 편성한 3개의 종대[17]로 7 기갑여단을 지원해 돌파구를 개척하고 여단의 기동을 보조하도록 했다.

고트 준장은 이들에게 각각의 목표를 배정했다. 제7 기갑여단과 제22 근위여단의 예하대가 할파야 고지를 돌파, 점거한 직후 카푸조 요새를 점령한 직후 독일군의 반격에 대비해 바르디아 방향으로 진출하고 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제22 근위여단의 또 다른 예하대는 할파야 고지의 북단과 솔룸을 점령하고 역습에 대비한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했다. 항공지원 또한 약속되었고 공군은 전방에 대한 공습보다는 전투지역 후방에서 최전방으로 향하는 추축군 부대와 보급로를 타격하도록 했다.

정찰과 전력보강에 힘쓰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독일군도 모르는건 아니었다.

영국군의 동향을 관찰하던 독일군의 무선감청부대 또한 영국군의 공격이 곧 개시될 것이란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고 이에 롬멜은 만약 영국군의 공격작전이 고강도의 수준에 이를 것에 대비하고 이에 대한 반격을 위해 이탈리아군의 트렌토 차량화 보병사단과 제15 기갑사단 예하 전차연대들을 포위망 동부 후방에 전진배치시키고 포위망 동부를 보다 강화하는 것으로 영연방군의 협공 기도를 저지하려 했다.

5월 15일, 영국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할파야 고지 남쪽으로 기동한 영국군 7기갑여단 예하 부대들은 접경지대에 자리한 추축군 정찰부대들을 카푸조 요새 북서쪽에 자리한 시디 아제이즈까지 패퇴시켰다.

영국군의 측면기동으로 인해 토브룩 포위선으로 향하는 최전방지역인 시디 아제이즈, 카푸조, 솔룸의 통제권을 위협 받자 독일군은 일단 돌출부인 할파야 고지를 포기하고 후방의 15 기갑사단과의 협동하에 카푸조에 공세여력을 집중하는 영국군 선발대에 대한 반격을 조속히 감행하기로 계획했다.

독일군의 신속한 후퇴에도 불구하고 할파야 고지의 통제권을 확보하고 솔룸에 대한 공격을 보조하기 위해 할파야 고지를 공격한 영국군 제22 근위여단은 할파야 고지를 수비하는 이탈리아군 베르사글리에리 2개 중대와 그들을 지원하는 대전차포 부대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운 영국군의 공격에 맞서 이탈리아군은 5월 15일 하루 동안 치열한 지연전을 감행했고 고지면에 배치된 이탈리아 포병대는 고지대의 특성을 살려 영국군에게 큰 출혈을 강요했다(보병전차 7대, 소수의 장갑차를 파괴했다).

2.5. 배틀액스 작전


2.6. 작전 실패


2.7.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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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가장 먼저 리비아에 도착한 독일 육군의 사단급 지상부대이며 차량화 보병사단의 개념으로 보면 편하다.
  • [2] 웨이벨 장군은 점령지를 포기하고 전력보존을 선택했으나 당장 2기갑사단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갑장비를 후방으로 추진할 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사단 예하 전차들의 대부분이 자력으로 사막을 횡단하다가 고장으로 인해 멈추어 버렸고 혼란 속에서 2기갑사단 예하 부대들 상당수는 후방으로 침투한 추축군 분견대들에게 와해되어 버렸다... 애시당초 수송수단과 항공전력의 부족에 허덕이던 키레나이카 주둔 영국군을 이끌던 니임과 오코너 중장이 취할 수 있었던 선택의 폭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 [3] 독일군의 주력 기동전력 중의 하나였던 15기갑사단이 편재상의 전력을 그럭저럭 갖출 시기는 1941년 6월이 다 되어서였다...;
  • [4] 1942년 7월 7일, 토브룩 함락에 대한 선전을 위해 Die Deutsche Wochenschau에서 보여준 토브룩 전도를 보면 1941년 4월에 구축된 시설물의 입지와 별반 다를게 없다. 그만큼 독일군이 토브룩에 대해 어떤 인상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잘 인지할 수 있다.
  • [5] 갈리폴리 전투와 플랑드르 전역에 종군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포함한 수많은 훈장을 받은 역전의 군인이다.
  • [6] 그들을 구원해줄 유일한 세력인 영국 지중해 함대 주력은 이탈리아 해군을 견재함과 동시에 그리스 전선에 발이 묶여 있었고 때문에 3만에 달하는 병력을 이집트로 철수시키기 위한 수송 수단은 전무한 상황이었다. 이탈리아군이 리비아를 침공한 1911년 이래 거점으로 삼았고 때문에 키레나이카에서 군사적 제반요소가 가장 튼실했던 토브룩에서 지연전을 감행한다는 웨이벨 장군의 선택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 [7] 10일 동안 추축군의 최전위부대를 맡아 용전분투했던 15기갑사단장 하인리히 폰 프리트비츠 소장과 제8 기관총대대장 구스타프 폰나트 중령을 포함한 많은 장교들이 단 10일과 14일에 걸쳐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 [8] 전차, 야포, 기관총, 기관포 등등... 참으로 다양했고 장비가 부족했던 영연방군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 [9] 얼마남지 않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준비도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다...
  • [10] 동맹군의 지휘체계를 무시함과 동시에 엄청난 희생과 열악한 보급에도 무리한 공격을 계속 감행하는...
  • [11] 농담이 아니고 진짜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육군 내부에서 유능한 참모장교로 손꼽혔고 롬멜도 전혀 모르고 있었던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 [12] 토브룩 포위전 기간중 연합군은 최전방 방어선을 레드 라인, 2차 방어선을 블루 라인, 최후 방어선을 그린 라인이라고 지칭했다.
  • [13] 영국 해군 또한 엄청난 함정 손실을 입었고 수병들은 토브룩으로 향하는 보급 함대를 자살 함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불과 얼마전 크레타에서 상당한 희생을 치른 지중해 함대의 사령관 커닝햄 제독은 호송로에서 해군이 입은 엄청난 피해에 후회를 표했지만 그의 굳은 결단력과 그와 육군 장성들과의 긴밀한 협조는 부하들은 물론이고 주변에서의 존경을 이끌어냈다.
  • [14] 정확히는 보급품의 전방 추진력이 부족했다. 롬멜의 무리한 진격요구로 인해 수송수단이 부족했던 추축군, 특히 이탈리아군은 보급품의 부족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4월 10일과 5월 초반까지의 공세 도중에 보급품을 제대로 전달 받지 못해 엄청난 갈증과 굶주림에 고통받은 이탈리아군 소부대들이 영연방군에게 항복한 사례들만 보아도 보급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군의 이런 사례에 대해 그들의 약체화를 머리로 먼저 떠올리기 전에 당신이 사막에서 며칠간 물과 식료품, 약품을 제대로 보급받지 못한체 공격만을 요구받는다고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정신론은 일본군 같은 막장군대나 강조하는 것이다...
  • [15] 그러면서 롬멜은 불과 며칠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열심히 보좌하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제5경사단장 슈트라이히 소장과 휘하 부하들을 갈아치웠다. -_-;
  • [16] 파울루스는 영국군의 전투력이 저대로 유지된다면 토브룩에 대한 직접공격이 무의미하다는 형식의 의사를 상부에 타전했다. 헌데 18개월 뒤에는 왜...
  • [17] 제4 기갑여단, 제22 근위여단의 예하부대들이 주축을 담당했다.